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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세 번째 부인’ : 베트남 사람들이 근대를 바라보는 어떤 방법

icon view11729 2021-09-15

영화가 과거를 향하는 것은 여러모로 영리한 선택이다. 한 사회 공동체의 공유된 기억은 대중들의 관심을 이끌어 내기에 충분할 뿐만 아니라, 기록된 역사 속에는 풍부한 드라마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영화 ‘명량’을 떠올려 보라. 이 영화는 더 이상 극적일 수 없는 역사적 사건에 기대어 오직 사람들이 어떻게 두려움을 이겨내었는가에 초점을 맞춰 스펙터클한 전투 장면을 연출한다.

또한 과거는 드라마를 지탱해 줄 참조점만 있다면 사실상 창작자의 무한한 자유의 공간이기도 하며, 영화를 통해 과거는 현재의 권력이나 금기, 도덕률로부터 우회해 대중들의 은밀한 욕망을 그려내는 공간이 되기도 한다.

‘분노’와 ‘디자이너’라는 두 편의 베트남 영화에서 현재 베트남인들이 느끼는 도시화의 충격과 소비주의에 대한 분열된 태도를 읽어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또박 또박 이웃과 사회 공동체를 강조하는 그들의 목소리는 어딘가 드러난 얼굴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래서 ‘세 번째 부인’의 시대극적 배경을 보며 어쩌면 이 영화를 통해 좀 더 내밀한 그들의 속내를 읽어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했다. 그런데 예상과는 달리 ‘세 번째 부인’은 한국 영화에서 보았던 익숙한 과거를 그리는 방식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었다.

‘세 번째 부인’은 19세기 후반 부유한 지주의 세 번째 아내가 되는 머이의 결혼에서부터 아이를 낳기까지의 시간을 그리고 있다.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영화의 설정에는 아버지가 진 빚의 대가로 혼인이 맺어졌다고 되어 있지만 극 중에는 그 정황이 표현되어 있지 않다. 수난극에 대한 우리의 짐작과는 달리 이 영화는 어린 그녀가 집안에 들어와 관찰자로서 자신과 집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바라보며 역할을 배워 나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결혼과 임신, 출산 과정을 통해 집안 내에서의 자신의 역할뿐만 아니라 성적인 주체로서 자신을 찾아가는 것이다.

​이 영화는 19세기 후반이라는 시간 배경이 주어져 있을 뿐 특별한 역사적 사건에 기대어 있지 않다. 베트남의 마지막, 응우옌 왕조가 1802년 프랑스 세력의 힘을 빌려 건국되어 1883년 프랑스에 의해 식민화되었다는 배경을 떠올려 본다면 19세기 후반을 배경으로 하는 이 영화에는 이상할 정도로 그 흔적이 드러나지 않는다. 이 시골마을에는 흔한 신문물조차 찾아보기 힘들어 만약 배경을 이야기해주지 않았다면 특정한 시대라고 알아차리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영화는 긴장감이 넘쳐나지만 중반부까지 특별한 극적 사건이 일어나지도 않고 이후에도 단일한 사건이 전체 이야기를 좌우하지도 않는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역사에서 드라마를 끌어오는 것이 아니라 마치 이마무라 쇼헤이의 ‘나라야마 부시코’처럼 머이가 속한 작은 가족과 농장을 인류학적 관찰의 시점으로 바라보고 있다. 어쩌면 그 관찰 결과를 모델링 하여 한 편의 극을 통해 펼쳐내 보여주고 있다고 하는 것이 좀 더 적절할 것 같다.

‘나라야마 부시코’는 19세기 말 어느 산골 마을에서 어머니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던 타즈헤이가 관습에 따라 일흔이 넘은 어머니를 산에 버리고 오기까지의 과정을 마을의 식량 사정을 둘러싼 여러 사건들을 통해 그려내고 있다. 이 영화 역시 시대적 배경이 잘 그려지지 않고 있는데 두 영화는 모두 역사를 19세기라는 축을 중심으로 이전의 시간을 잘라내어 전근대 사회 일반에 대해 탈 역사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그렇기에 이는 마치 프랑스 계몽주의자들의 ‘자연 상태’ 개념처럼 근대인에 비추어진 전근대 시대의 모습을 거울상처럼 그리고 있는 것이다.

‘세 번째 부인’은 언뜻 인간이라는 동물이 보여주는 관능이 사회적 제약 속에서 어떻게 발산되고 조절되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다. 그런 맥락에서 첫 번째 부인이 전통과 관습의 수호자라면 두 번째 부인은 관능의 안내자이다. 머이는 첫째 부인을 보며 농장 내에서의 가축을 기르고 집안을 관리하는 것을 배우는 반면 둘째 부인은 결혼식에서 노래를 부르며 성적 쾌락을 느끼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머이에게 가르쳐 준다.

그런데 후반부의 중심적인 사건은 이 두 번째 부인을 축으로 해서 일어난다. 그녀는 장남인 첫째 부인의 아들과 내연의 관계였는데 이로 인해 장남은 자살 소동을 벌이고 모르는 이와의 결혼을 할 수 없다고 고집한다. 장남은 결국 결혼을 하게 되지만 부인을 받아들이지 않자 장남의 어린 부인은 자살을 하게 된다. 그런 과정 속에서 둘째 부인의 정사를 훔쳐보았던 머이는 그녀에게 동성애적 애정을 느끼고 고백하지만 둘째 부인은 ‘너는 나의 딸 같은 아이’라고 그녀를 달랜다.

영화에서 그려진 이 집안은 그 자체로 잘 통합된 완결적인 세계로 보인다. 세 명의 부인 사이에는 언뜻 갈등이 일어날 것 같은 긴장감이 감돌기도 한다. 아들이 없던 둘째 부인과 첫째 부인 사이의 관계나, 남편의 사랑을 두고 첫째 부인과 머이 사이의 미묘한 기류가 그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갈등들은 대부분 큰 사건을 낳지 않고 성숙한 태도로 매끄럽게 봉합된다. 머이는 자신만 아들을 갖고 싶어 했던 기도로 인해 첫째 부인이 유산을 했을까 봐 고통스러워하고 둘째 부인은 그것은 너의 잘못이 아니라고 달래준다.

영화 속 머이가 출산 과정에서 죽음 직전에 이르렀을 때 제왕절개로 머이를 구했던 것은 망설이던 첫째 부인이다. 이 가족은 기본적으로 화목하고 서로의 아이들을 보살핀다. 그리고 농장에서 일어난 일꾼들의 사건들도 노동력을 유지하면서도 도덕적으로 교화되는 방향으로 진행된다. 이런 구성원들 사이의 근본적인 갈등이 존재하지 않는 관계는 베트남 영화의 공통적 경향이며 익숙한 공동체적 정서이다.

그런데 이 영화의 뛰어난 성취는 그럼에도 계속되는 그 팽팽한 기류를 잘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사도 사건도 많지 않은 이 영화에서 긴장감을 유지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상당히 훌륭한 연출을 했다는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긴장감의 원천이 사실 극 바깥에 있다는 점이다.

잘 봉합되고 있음에도 왠지 무슨 일이 생겨날 것 같은 이 분위기는 결국 이 전통사회가 곧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기 때문일 것이다. 이 영화는 필연적으로 붕괴될 세계의 조화로움을 수려한 화면을 통해 관객들에게 전달하고 있다. 그렇기에 이상한 이 잉여의 긴장감은 그 자체로 영화의 보이지 않는 영혼인 것이다.

후반부 영화를 마무리 짓는 자살 사건은 이 체재가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를 전면화하고 있다. 개인의 욕망이 고개를 들수록 전통 사회의 제약은 무력해진다. 하지만 감독은 그에 대해 도덕적 판단을 미룬 것처럼 보인다. 섣불리 전근대 체제를 비인간적인 어떤 것으로도 지속 불가능한 결함 있는 체제로도 보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이 체제가 붕괴된 것은 내재적 모순이라기보다는 근본적으로 외세의 압력에 의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후의 역사를 알고 있는 후세인으로서 감독은 도덕적 판단보다는 거대한 격변을 앞에 둔 사람들을 보여주기로 결정했다. 장례식을 마치고 머이는 딸을 안고 강가에 앉아 있는데 아기는 울고 있고 머이는 쉽게 달랠 수가 없다. 그녀의 당혹스러운 표정과 울음을 멈추지 않는 아기는 프랑스와 미국 중국이라는 거대한 제국과 싸워내야만 하는 베트남 민중들의 운명을 보여주는 것이다.

영화는 장례식 후 둘째 부인의 어린 둘째 딸이 긴 머리카락을 단발로 잘라 강가에 떠내려 보내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역사의 물결은 단호한 의지와 함께 20세기 근대의 격변의 장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이다.

 

 

글쓴이 이가
서사 의존적인 인간의 삶과 사회,
그리고 아름다움에 관심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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