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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대중 영화의 최전선 《천하대전: 왕좌의 전쟁》

icon view1796 2022-07-12

※ 해당 기사에는 천하대전: 왕좌의 전쟁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천하대전: 왕좌의 전쟁

– 개봉: 2017.02.02
– 장르: 액션/어드벤처
– 국가: 베트남
– 등급: 12세이상관람가
– 러닝타임: 114분

천하대전: 왕좌의 전쟁 한국 포스터 (출처: 다음영화)

2016년 부산 국제 영화제 ‘아시아 영화의 창’ 부문에 소개되어 한국 극장에서도 개봉된 바 있는 베트남 영화 ‘천하대전, 왕좌의 전쟁(2016)’은 베트남 대중문화의 최전선에 서 있는 영화라고 소개하고 싶다. 이 영화는 기술적으로 공들인 CG 화면으로 베트남인의 이상향을 시각화시켜 냈을 뿐 아니라, 할리우드 영화에서 본 듯한 역사 판타지물의 설정들이 여기저기에 녹아들어 있다. 또 마치 한국 영화처럼, 주요 배역에 보이그룹 멤버를 캐스팅 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 대중들을 극장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상업적 열정 역시 고스란히 담겨 있다.

베트남의 인기 아이돌 가수 겸 배우 아이작(Isaac), 왕세자 역할을 맡았다. (출처: 텐아시아)

우리에게도 꽤나 친숙한 ‘대중문화’라는 개념은 1920년대 서구 근대 사회의 급격한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 등장했다. 대중문화는 매스미디어의 발달로 가능해진 대량으로 유통, 소비되는 새로운 형태의 문화 형식을 말한다. 고급문화의 대척점으로서 대중문화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도 많았지만 현재는 그 논쟁마저도 조금은 낡아 버린 시점이 되었다.

그럼에도 ‘천하대전, 왕좌의 전쟁’에 대해 대중문화라는 개념을 끌어 쓰게 된 것은 개혁 개방 경제의 성과로 소득이 늘고 도시화가 가속화 되고 있는 베트남에서 대중성이 구축되어 가는 모습이 이 영화에 도드라지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IT 기술의 혁신과 그로 인해 미디어 환경이 변하면서 현재 한국 사회의 대중은 해체되어 가고 있기에 이러한 변화는 더욱 눈에 띈다.

대중문화는 대량 생산, 대량 소비되는 다른 상품과 마찬가지로 다수가 동시에 같은 작품을 즐긴다는 속성이 있다. 기술적으로 보았을 때 영화라는 기술 복제 매체는 텔레비전과 마찬가지로 이런 대량 소비에 최적화되어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같은 작품을 즐긴다는 말이 성립되지 않는다. 다소 짧은 러닝타임 안에 가득 들어찬 스토리는 관객에게 모두 다르게 와닿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중 영화에는 우선 서로 다른 사람들이 동시에 읽어낼 수 있는 공통 기호와 함께 원초적인 즐길 거리가 있어야 한다.

그런 측면에서 ‘천하대전, 왕좌의 전쟁’은 단순하지만 베트남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기호를 사용하고 있다. 베트남의 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영화의 스토리를 간단히 정리하면 ‘베트남의 신데렐라 이야기, 그 이후’라고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배경은 어느 왕국, 국왕의 병세가 악화되자 총독은 왕세자에게 혼인을 할 것을 제안하고 이에 왕세자비 간택을 위한 축제를 연다. 한편 계모와 언니의 구박에도 꿋꿋하게 살아가던 ‘땀’은 신선의 도움으로 겨우 축제에 참여한다. 왕세자와 사랑에 빠진 땀은 결혼 후 행복한 나날을 보낸다. 하지만 땀은 총독의 사주를 받은 언니와 계모에 의해 살해당하고 총독과 결탁한 친라국은 국경을 침범해 전쟁을 일으킨다. 무예와 병략에 능했던 왕세자는 최선을 다했지만 기밀이 새어나가 씻을 수 없는 패배를 당하게 된다.

행복해 보이는 떰과 왕세자 (출처: 다음영화

아마 베트남 영화를 처음으로 접하는 한국 관객이라면 이야기의 저변에 흐르는 가치관과 정서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 우선 놀랄 것이다. 베트남은 동남아시아에 위치하고 있지만 주변국과는 달리 오랫동안 유교 문화권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 한국 관객의 리뷰처럼 이 영화의 서사는 지나치게 단순해 보이기도 한다. 우리가 이 영화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단순함 속에 정체되어 있지 않은 부분이다.

‘신선’을 유쾌하게 그리며 기존 클리셰를 바꾸고 있다. (출처: amazon)

이 영화의 축이 되는 신데렐라 스토리는 전체 1시간 54분의 러닝 타임 중 대략 50여분 쯤으로 빠르게 종결되고 이후에는 역사 판타지물로 변형된다. 그리고 초반부 신데렐라 스토리의 가장 중요한 조력자인 신선은 눈물을 흘리는 여자 주인공 땀의 말을 재차 끊으며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나는 다 알고 있다, 너는 너무 예측 가능하다’며 수다스럽게 면박을 준다. 이는 상투적인 클리셰들을 갱신해 나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대중 영화의 스토리텔링에서 중요한 점은 관객의 상투적인 기대를 만족시키면서도 그것을 적절히 배신해 나가는 것에 있다. 그 과정을 중첩해 나가다 보면 전체 이야기는 점점 고도화된다.

아름다운 땀의 모습 (출처: imdb)

이 영화가 한국 영화와 같은 정서를 공유하는 것은 서사의 유사성이 아니라 바로 속도감일 수 있다. 무도회에 가는 것을 방해하기 위해 계모는 땀에게 서로 다른 색의 콩을 섞어 분류하라고 시켰지만, 그것을 도와주는 신선이 콩을 분류하는 장면은 생략되고 땀이 축제가 열리고 있는 궁전을 향해 말을 타고 내달리는 신으로 넘어가는 식이다.

또한 이 영화는 명확한 선악 구도를 그릴 때 우리에게도 익숙한 반중 정서에 기대고 있다. 힘은 강하지만 미개한 부족으로 우스꽝스럽게 그려지는 친라족은 발음에서도 차이나가 연상된다. 중국에 대한 반감이 노골적으로 담겨 있는 것이다. 중국은 과거 천 년가량 베트남을 지배했고, 근세에 들어서도 1974년 파라셀 군도1)를 점령하기도 했다. 또한 베트남은 2차 인도차이나 전쟁 이후(베트남 전쟁) 1979년 중국과 전쟁을 하기도 했다. 역사를 통해 끊임없이 반복되는 중국의 침략과 그에 대한 항쟁은 베트남인에게 중국에 대한 반감을 깊숙이 심어두었다.

파라셀 군도1) : 남중국해의 중국 해남도(하이난섬) 남쪽 336km, 베트남 동쪽 445km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군도로, 40여 개의 소도·사주·암초로 구성되어 있다. 중국과 베트남 간 영유권 분쟁 지역으로 ‘서사군도’, ‘황사군도’라고도 한다.

1970년 혹은 그 이전 중국은 서사군도의 동쪽 군도를 점유하고 있었고, 서쪽 군도는 베트남이 점유하고 있었다. 그런데 1974년 1월 베트남전을 틈타 중국이 서쪽 군도의 5개 소도를 무력으로 점령한 뒤 현재까지 서사군도 전 도서에 대한 실질적인 점유권을 행사하고 있다. 특히 중국은 1992년 2월 남중국해를 포함하는 영해법을 공표, 대내외적으로 남중국해 부속 도서에 대한 영유권을 공식화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익숙한 구도를 통해 이 영화가 수월하게 그려내고 있는 것은 임박한 중국의 위협이 아니라 베트남 사회가 새로운 질서를 맞이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인지 처절하게 그려져야 하는 친라족과의 전투는 다른 장면과는 달리 짜고 치는 게임처럼 긴장감 없이 처리되고 있다. 늙은 왕은 이야기의 시작부터 죽어가고 있었고 외부의 위협은 점증하고 있다.

결국 이 영화는 고전 설화와 반중 정서라는 편리한 틀에 기대어 젊은 왕세자와 왕세자비가 새로운 시대에 맞서 나가는 이야기다. 그 새로운 시대가 상기시키는 것은 두말할 필요 없이 베트남의 개혁 개방 이후 시장 질서로의 전면적인 이행이다. 영화의 후반부 왕세자는 정체를 드러낸 총독에 맞서기 위해 총독처럼 흉측한 괴물이 된다. 이 이상하고 갑작스러운 판타지 장르로의 전환이 극적인 상황을 그리기에 효과적인가는 의문이지만 그럼에도 중요한 것은 똑같은 괴물이 되어서라도 적에게 맞서겠노라는 집단적 의지의 표출이라는 점이다. 이는 사회주의를 유지하면서도 글로벌 시장 질서에 편입된, 베트남인의 모순적 상황에 대한 정서적 반응일 것이다.

왕실을 요괴의 손에서 구하기 위한 전쟁이 시작된다. (출처: 다음영화)

대중 영화로서 ‘천하대전, 왕좌의 전쟁’은 이 단순하고 간명한 서사에 기대어 매력적인 캐릭터와 볼거리를 제공한다. 이 영화에서 CG는 주로 궁궐과 자연 경관을 그리기 위해서 사용된다. 요새처럼 산중에 위치하면서도 물에 둘러 쌓여 있는 아름다운 자연 경관은 베트남인이 가지는 어떤 이상향을 시각화하여 보는 즐거움을 제공한다.

또한 성실하고 의지 있는 두 명의 주인공 못지않게 주목 받는 인물, ‘신선’과 왕세자의 측근 ‘루크’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 두 캐릭터는 모두 수다스럽고 유머러스하며 인간적인 매력을 지닌다. 특히 루크는 왕세자의 또 다른 측근이며 과묵한 무관, ‘트란 방’과는 달리 다소 허술한 성격으로 그려진다. 하지만 트란 방이 왕세자를 배신한 것과는 달리 루크는 왕세자가 재기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는 귀족적이고 고전적인 인물보다는 세속적이고 평범한 인물에 점수를 주는 구도인 것이다. 이전의 봉건적 혹은 관료적인 사회와는 다른 자본주의적 속성이 베트남 문화의 주류를 차지해 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성실하고 의지 있는 두 주인공, 왕세자와 땀 (출처: 다음영화)

이 영화의 메시지는 다른 베트남 영화의 그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의지를 가지되 선량하고 성실하라. 지나친 욕망보다는 성실하게 노동하고 인간성을 지켜라. 하지만 이런 예측 가능한 결론이 다소 공허하게 느껴지는 것은 다른 글에서도 지적한 바 있듯 사회적 모순이 생략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다시 말해 복잡한 이야기가 설득력을 얻게 되는 것은 사회 자체의 모순이 인물의 모순으로 이전될 때다. 그렇기에 영화에서 악인의 매력은 무엇보다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하지만 이 영화 속 악인들은 다른 베트남 영화처럼 그저 ‘성정이 나쁜’ 매우 평면적인 모습에 머문다. 그럼에도 주목할 만한 부분은 에필로그에서 계모가 땀이 차린 밥을 먹는 장면이다. 이 갑작스럽고 맥락을 벗어난 표현은 마치 갑자기 괴물로 변하는 왕세자처럼 의미심장해 보였다. 계모의 부들거리는 손과 알 수 없는 강렬한 눈빛은 단순한 분노, 혹은 악행에 대한 반성으로만 해석되지 않기 때문이다. 아직 다 펼쳐지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지금까지 접한 베트남 영화에서는 처음으로 만난 존재감 있는 악인의 모습이었다.

글쓴이 이가
서사 의존적인 인간의 삶과 사회,
그리고 아름다움에 관심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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