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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사람들이 은행 말고 ‘전당포’를 찾아가는 이유

icon view2831 2020-09-22
Veyond 매거진

축구 경기가 끝나면, 누군가는 전당포로 간다

지난 12월, 베트남 축구대표팀이 동남 아시안(SEA) 게임에서 우승했다. 60년 만의 우승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거리에 모여 ‘할 수 있다(Có thể làm)’를 외치며 승리를 만끽했다. 승리의 열기 가득한 거리를 피해 골목으로 들어가보자. 사람들이 모여있다. 전당포(Cam do) 앞이다.

베트남 전당포 모습

베트남 전당포는 통상 9-6로 영업하지만 국제 축구 경기가 벌어지는 때면 24시간 근무 체제로 바뀐다. 주말도 쉬지 않는다. 축구 열기가 뜨거운 베트남에서 국제경기가 열리는 시점이면 도박도 같이 성행하기 때문이다. 전당포마다 오토바이, 휴대전화기, 노트북 등 고가의 담보물을 받아 챙겼다. 가족 몰래 부동산 서류를 들고 오는 사람도 있었다.

​전당포들은 대출 이자를 평소의 두 배로 올렸지만 사람들은 평소보다 네 배 이상 몰렸다. 몰려드는 오토바이와 자동차를 감당할 수 없어서 창고를 구해야 했다. 창고 임대 매물이 덩달아 오르는 기현상이 벌어지기도 했다.

​전당포들은 고리의 이자를 받아 챙기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다. 빌린 돈을 제대로 상환하지 못할 경우 담보물을 팔아 원리금을 회수하는 게 사업의 주된 방식이었다. 담보물에 대한 시비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폭력조직과 결탁하는 사례도 흔했다. 큰 경기가 벌어질 때면 도박으로 값비싼 물건을 탕진한 서민들의 소식이 들려오는 경우도 많다.

베트남에 ‘전당포’가 유독 많은 이유

돈이 필요하면 우선은 은행에 가야하지 않을까? 베트남의 상황이 이렇게 된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베트남 소매금융 시스템이 제대로 자리 잡기도 전에 전당포가 그 역할을 대신했고, 규제 또한 제대로 닿지 않은 탓에 서민들은 필요한 자금이 있으면 전당포를 이용하기 시작했다. 특히 축구 도박에 필요한 자금을 활용하기 위해 전당포를 이용하는 경우가 많다. 사람이 몰리는 만큼 전당포는 더욱 높은 이자를 받았다. 악순환이 계속되는 상황이었다.

축구 베팅 베트남 사이트
축구 베팅이 상당히 활성화되어 있는 베트남

베트남 당국은 국민들을 상대로 전당포를 통한 고금리 사채 이용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한편 법률도 개정했다. 민법에는 “금리는 대출 금액의 20%를 초과할 수 없다”라는 내용을 담았고 형법에는 연 100%를 넘는 이자를 챙기는 고리대금업자에게 형사처분을 명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규정도 크게 의미가 없었다. 지난 2018년 푸뉴언(Phu Nhuan)에 사는 한 베트남 남성의 대출 이자율은 19.9%로, 당국이 지정한 범위 내였다. 그러나 이 대출에는 이자율 말고 전당포에 맡긴 물건 관리비로 하루 2% 이자가 추가 발생하는 특약이 있었다. 한 달이면 무려 60%이며, 결국 이 대출의 최종 월 금리는 80%에 육박하게 된다. 전당포를 통한 대출 업체들은 다양한 편법을 통해 당국이 정한 금리 제한 규정을 우회하고 있다.

​금융 공백을 채우려는 베트남 당국의 노력

가장 중요한 문제는 베트남 사람들이 자국 은행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2017년 기준, 베트남 인구 중 은행 계좌를 보유한 사람은 34%에 불과하다. 압도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금융 거래가 아니라 현금을 이용해 물건을 사고 값을 지불한다.

은행 불신과 규제 공백으로 금융업이 제대로 발전하지 못했지만 민간의 소매금융에 대한 수요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 수요를 전당포와 고리대금업체가 채웠다. 베트남 정부는 현재 고금리 사채업자를 통한 대출 규모가 약 2조 5000억 동(약 1205억 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 고리대금업자들은 각종 사회문제를 만들어냈다. 베트남은 소매금융 수요를 양성화시켜야 할 과제를 안고 있었다.

​정부는 2019년부터 국책은행인 농업은행(Agribank)를 통해 5000억 동(한화 약 250억) 규모의 긴급 구제 자금을 투입했다. 농업은행 측은 베트남 내 소매금융의 취약점을 예로 들며 정책의 필요성을 설명했다. 다오 민 뚜 농업은행 부행장은 “갑자기 가족 중 환자가 발생해 병원비가 필요한 경우 은행 대출을 받기 위해 3~5일을 기다릴 수 없다”라며 “생활에 필요한 긴급 자금을 신속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3,000만 동 이하는 간단한 절차를 통해 합리적인 금리로 대출받게 할 것”라고 설명했다. 뚜 부행장은 “정부는 은행들이 저소득층을 위한 소비자 대출 프로그램을 마련해 보고하도록 한 상태”라며 “이런 프로그램을 운영하면 시골이나 금융 서비스 소외 지역의 고금리 사채업은 확실히 억제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폭리를 취하는 대부업자들에 대항하는 움직임은 민간에서도 일고 있다. 소위 ‘착한 전당포’로 불리는 F88의 등장이다. 2013년에 처음 문을 연 F88은 대출 잔액 6000억 동(한화 약 300억)이 넘고 거래 건수도 연간 5만 건에 달할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 2019년 9월에는 100번째 점포를 열었다.

가게 홍보하는 사람들

F88의 성공 원인은 ‘전당포의 양성화’에 있었다. F88은 다른 불법 전당포들과 달리 담보물을 매각하는 데 목적을 두지 않고 ‘소매 금융’의 목적에 충실히 따랐다. 담보물 관리도 철저했다. 휴대폰, 노트북 등의 담보물에 대해서는 대출과 동시에 봉인하고, 만약 화재가 나 담보물에 피해가 생기더라도 보상받을 수 있도록 했다. 고리대금업자와 다른 사설 전당포의 횡포에 시달린 베트남 서민들에게 F88은 매력적이고 합리적인 대안이었다.

아직은 걸음마 단계, 그만큼 무한한 가능성

베트남 소매금융 시장의 잠재력이 매우 크다. 베트남 금융 감독 위원회에 따르면 소비자 대출 시장(consumer lending market)은 2016년에 50.2%, 2017년에는 65% 성장했다. 특히 주택(52.9%), 가구(15.3%), 자동차(8.3%) 구매를 위한 대출 수요가 크게 늘고 있다고 설명했다.

​월드뱅크는 아시아ㆍ태평양 지역 개발도상국의 은행 계좌 보유 비율이 60%가 넘는데 반해 베트남은 30%에 불과하다고 설명했다. 대출 인구 역시 인근 태국(71%)에 비해 훨씬 낮은 37%에 불과했다. 베트남 소비자 금융시장의 성장 가능성을 가늠케 하는 지표들이다.

​이 같은 상황 때문에 다수의 한국 금융기업들은 베트남 시장 공략에 나서고 있다. 신한은행, 우리은행, 국민은행을 비롯한 총 9개 은행이 진출한 상태이며 한화생명, 롯데카드, 현대카드 등 비은행 금융기업들도 진출했거나 진출을 노리고 있다.

​가장 모범적인 사례는 신한은행이다. 신한은행은 베트남 내 외국계 은행 1위로 확고히 자리매김하고 있다. 2017년 호주계 베트남 은행인 ANZ 은행의 베트남 소매금융 사업 부문을 인수하며 몸집을 불린 신한은행은 베트남 내 소매 대출액을 2017년 7억 2000만 달러에서 2018년 9억 5200만 달러로 1년 만에 32%나 늘이며 HSBC 은행을 앞지르기도 했다.

베트남에 진출한 한국 신한은행
베트남 내 외국계 은행 1위, 신한은행

신한은행의 뒤를 바짝 뒤쫓고 있는 우리은행도 현재 총 11곳의 지점을 확보하며 영업망을 확대해나가고 있다. 여수신 업무 외에도 방카슈랑스 신용카드 분야까지 영업 분야를 확대하고 있는 우리은행은 지난해 3분기까지의 누적 순이익이 전년 동기 대비 32.8% 증가한 102억 500만 원을 기록하며 착실한 성장세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은행이 순탄하게 영업을 진행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기업은행은 지난 2017년 7월 베트남 중앙은행(SBV)에 법인인가 신청서를 제출했으나 아직까지 인가를 받지 못했다. 외국계 은행의 무분별한 자국 진출에 베트남 정부가 제동을 걸어 나섰기 때문이다. 베트남 브엉딘후에(Vuong Dinh Hue) 부총리가 지난 2018년 8월, 베트남 금융 시스템 강화 및 기존 베트남 금융기관들의 내실을 다지고 국내 금융 시스템 강화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외국인 투자자에게 신규 금융 라이선스 발급을 중단하겠다고 발표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베트남 당국이 무작정 외국 은행에 빗장을 걸어둔 것은 아니다. 앞서 언급했듯 베트남의 금융은 아직 걸음마 단계다. 시장 안정화 및 금융 시스템 개선을 위해서 외국 자본을 적절히 활용할 필요도 있다. 그래서 베트남은 외국계 은행이 현지에 직접 은행을 세우기는 까다롭게 만든 반면에 해외자본이 현지은행을 인수한 뒤 구조조정을 통해 100% 해외자본으로 전환하는 것은 허용했다. 즉 베트남은 자국에 대한 글로벌 자본의 금융업 투자는 허용하되 반드시 자국 은행을 거쳐서 하게끔 제도를 설계한 것이다.

​이런 이유로 최근 베트남에 진출하는 한국계 금융사들은 현지 은행의 지분을 매입하는 방식으로 전략을 수정하고 있다. NH농협은행은 베트남 최대 국책은행(지점 2230개)인 농업은행(Agribank)의 지분을 인수하기 위해 논의 중이며 KEB 하나은행은 지난해 7월 베트남 자산 1위 은행인 베트남 투자개발은행 지분 15%를 1조 249억 원에 인수하는 계약을 체결하기도 했다. 이 밖에도 우리은행과 롯데카드, DGB 대구은행 등도 베트남에 직접 진출하거나 현지 금융사와 협약을 맺고 사업을 진행 중이다.


1억에 육박하는 인구, 젊은 층이 절반을 차지하는 시장, 탄탄한 성장세로 국민 소득이 빠르게 증가하고 있는 베트남에서 고가의 물건을 소비하기 위해 할부 금융이나 집을 구입하기 위한 담보대출, 급전을 처리하기 위한 소액 대출 등의 수요는 계속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베트남 ‘도이머이 세대’와 같은 젊은 층이 ‘잘로’와 같은 어플을 이용한 이용한 간편 결제에 익숙해지는 만큼, 베트남 여기저기에서 볼 수 있는 ‘전당포’도 언젠가는 과거 세대의 기억으로 남을지도 모를 일이다.

ⓒ VEYOND MAGA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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