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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디자이너’를 보면 자본주의에 대한 베트남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icon view2236 2021-06-03

헐리우드에서 만들어지는 타임 슬립 영화들은 유독 테크놀로지에 기반한 복잡한 세계관이 설정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당장 우리에게 익숙한 시간여행 드라마 ‘나인’이나 영국의 타임워프 영화 ‘어바웃 타임’ 같은 경우에는 타임슬립의 매개물은 각각 ‘향’과 ‘옷장’이지 인터스텔라에 등장하는 ‘블랙홀’ 같은 게 아니다.

베트남 영화 디자이너
드라마 ‘나인’ 에서 등장하는 향

​그러나 헐리우드가 무언가 더욱 특별해서 그러는 건 아니다. 원래 창작물은 창작자가 속한 문화권의 자연스러운 상상이 반영된다. 그게 한국에서는 향이었고 영국에서는 옷장이었으면 미국에서는 블랙홀이었을 뿐이다. 그렇다면 베트남은 어떨까?

지금부터 이야기 해 볼 베트남 영화 ‘디자이너’는 옥이 장식되어 있는 베트남의 전통의상 아오자이를 통해 다른 시간을 향해 미끌어져 들어간다는 설정의 타임슬립물이다.

베트남 영화 디자이너
한국에서도 개봉된 바 있는 베트남 영화 ‘디자이너’

촘촘하지는 않지만, 괜찮은 상업영화

‘디자이너’는 시간 여행물과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라는 영화가 느슨하게 이어진 이종 상업 영화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이 영화는 그다지 촘촘하게 짜여져 있지는 않다. 타임슬립 특유의 시간의 얽힘에 대한 복잡한 구성을 취하고 있지도 않거니와 패션 업계의 내밀한 뒷 얘기를 담고 있지도 않다. 영화는 별다른 극적 계기 없이 부드럽게 결말을 향해 순항할 뿐이다. 훌륭한 상업영화들은 캐릭터 속에서도 인간의 얼굴이 종종 드러나게 되는데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서 패션업계에서 독재자로 군림하는 미란다의 복잡한 심리가 언뜻 드러나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디자이너’에서의 인물들은 각자의 평면적인 역할이 있을 뿐 인간의 복잡함이 드러나지는 않는다. 그러다 보니 그 인물들의 역동으로 이루어지는 극적 사건들 역시 그저 그렇게 되어 갈 뿐 사건들 속에서 발버둥치는 인간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베트남 영화 디자이너

​그럼에도 이 영화가 상업영화로서 기능할 수 있는 것은 볼거리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키기 때문일 것이다. 전통의상 아오자이와 60년대 패션 피플들의 빈티지한 멋과 2017년의 사이공의 화려한 패션, 도시와의 대조를 마치 뮤지컬처럼 리듬감 있게 이어나가는 것이 그 전략이다. 그 화해를 패션쇼에 올려진 아오자이의 아름다움을 통해 마무리하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이 영화 역시 ‘분노’에서와 마찬가지로 2017년의 도시화 된 사이공을 충격 그 자체로 바라본다.

감독은 현대로 도착한 직후 사이공의 도심에서 수많은 오토바이와 고층 빌딩들 사이에서 길을 잃은 느이를 핸드 헬드의 불안정한 화면 속에 그려낸다. 그녀는 패닉에 빠져 사람들과 부딪히고 차에 부딪힐 뻔 한다. 연출기법은 다를지라도 두 영화의 목표는 사이공의 도시화가 베트남 사람들에게 얼마나 충격적인 사건이었는지를 표현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 이면의 정서를 뒷골목의 풍경을 통해 전달하고 싶어했던 ‘분노’와는 달리 사이공이라는 거대 도시를 재빨리 상쾌한 볼거리로 전환시킨다. 길거리를 오가는 패션피플들과 고층 건물들, 패션쇼의 장면들을 쉴새 없이 전시하는 것이다.

베트남 영화 디자이너

베트남 대중들이 근현대사를 바라보는 관점을 담다

이 영화에서 우선 눈에 띄었던 점. 극 중 1969년에서 넘어온 느이를 2017년의 인물들은 아무렇지 않게 자신들의 일원으로 받아들인다는 점이었다. 칸이 자기 자신의 모습을 알아보는 것은 이상하지 않지만 수양 조카인 헬렌이나 다른 주변 인물들이 아무도 그를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것이 그것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1969년 배경에서 베트남 전쟁이 완전히 제거되어 있다는 점도 흥미롭다. 비록 극 초반 짧은 시간이었지만 60년대 후반은 미국이 개입한 전면전의 시기였음에도 사이공은 느이의 저택과 파티장 외에는 전혀 묘사되고 있지 않다. 패션 동향을 보도하는 신문의 한구석에도 전쟁에 대한 이야기는 적혀 있지 않다. 그러니까 69년의 시간적 배경은 마치 영어와 프랑스어와 베트남어가 섞여 벌이는 한바탕 취향의 파티처럼 그려지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곧바로 점프하는 2017년으로의 시간여행은 베트남 전쟁뿐만 아니라 개혁 개방 이전의 베트남의 시간도 생략하고 있은 것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러한 연속성에 대한 감각은 어찌보면 60년대 이후의 베트남 전쟁과 통일, 이후의 중국과의 전쟁 그리고 개혁 개방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에서의 주체성과 유연성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였다. 실제로 민족주의의 맥락에서 보면 사이공의 부유층은 반민족주의자일 수도 있고, 공산주의의 맥락에서 보면 패션피플의 소비문화는 부르주아적 풍조로 보일 수도 있다.

베트남 영화 디자이너

하지만 그 모든 인물들이 영화 속에서 부드럽게 받아들여 진다는 것은 대중들이 오랜 시간에 걸친 사회의 변화를 온전히 스스로의 의지적 선택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지금의 개혁개방을 선택한 시점에서 이전의 베트남 전쟁과 반제국주의적 사회주의적 문화정책을 취했던 시간을 접어 두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베트남이 과거에 연연하지 않고 실용적인 차원에서 친미주의적 공산주의 국가라는 특별한 노선을 걷는 것에 맞닿아 있는 것이기도 하다.

​실제 아오자이의 경우만 보더라도 베트남 통일 이후 여성의 몸매를 대상화 하는 자본주의 문화로서 오랜 기간 배척당했었다. 하지만 개혁 개방 정책 이후 90년대에 외국에서 호평을 받아 공산당 당국이 긍정적인 국가 이미지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하여 대대적으로 착용을 권장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현대에 되살아난 아오자이는 결국 베트남 사회가 방향을 바꾸어 다시 1960년대 이전의 서구 문화에 재접속하고 있는 것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기도 하다.

사실 타임 슬립 영화들은 대체로 현재에서 과거로 여행을 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기본적으로 과거에 대한 후회의 정서를 담고 있다. 하지만 이 영화는 호기롭게 직접적으로 현재를 바꾸어 과거를 구원하려고 하고 있다. 그런데 그런 태도가 바로 베트남 대중들의 근대사에 대한 태도 같아 보이기도 한다는 것이다.

물질적인, 동시에 도덕적인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2017년 사이공의 소비문화를 보여주는 것에 있어 상당히 절제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패션 피플들이 거리를 걸어가는 장면도 아주 빠르게 지나쳐 간다거나 도시의 야경 역시 그리 지나치게 강조되고 있지는 않다. 아마 이런 접근은 물질주의에 대한 일종의 도덕적 제어장치들이 강하게 작동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이 공산주의든 공동체주의든 유교적 전통이든 말이다. 물질주의에 대한 비판을 빌미로 소비주의에 대한 자극적인 열망이 상영되는 한국의 영화를 떠올려 보라.

​또한 주인공 느이는 결국 미래, 즉 현재로 향해 스스로를 구원하지만 그녀의 캐릭터는 허영심에 가득찬 철없는 캐릭터로 그려지고 있다. 결국 교정되는 것은 전통에 대한 그녀의 태도라기보다는 바로 그 맹목적인 물질중심적 서구 개인주의 사상이기도 하다. 이는 역사적 맥락에서 베트남전 당시의 남베트남의 기득권들을 바라보는 베트남 인들의 시각이기도 할 것이다. 결국 시장주의적 물질주의에 대한 베트남인들의 사고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과 그것을 경계하는 것 사이에서 마치 느이와 칸 처럼 분열되어 있다. 그것은 그 물질적 혜택이 모든 사람에게 돌아가지 않은 현실에서의 도덕적 반응이기도 할 것이다.

​이 영화의 가장 결정적인 장면에서 느이가 감사하기로 결심하는 것은 바로 헬렌이다. 이는 영화를 보는 이방인에게는 상당한 반전이었다. 헬렌은 그녀와 가장 대립적인 인물이었으며 어떤 도움도 주지 않았고 자신을 위기에 몰아 넣기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느이는 헬렌이 없었으면 자신이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며 자신이 아오자이를 찾는 과정에서 가족, 동료의 가치에 대해 다시 알게 되었다고 직접적으로 연설한다. ‘분노’와 마찬가지로 직접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으며, 가족을 넘어선 공동체의 가치에 대해서 역설하고 있다.​

하지만 헬렌에 대한 감사는 그 전통이나 공동체의 가치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바로 자본가가 필요하다는 말이 아닌가? 적어도 공식적인 역사와 이 영화의 세계에서는 이런 해석에 별 모순은 없어 보인다. 하지만 바로 그 시점에서 명확한 의문이 들고 일어났다. 이 영화와 ‘분노’에는 사건이 있을 뿐 근본적인 차원의 갈등이 없으며 같은 맥락에서 로맨스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끊임없이 공동체와 동료애에 대해 강조한다. 그렇다면 시장경제가 광범위하게 도입된 베트남 사회에 어떤 근본적인 균열도 없는 것일까? 그것은 아직 공산주의적 공동체주의가 붕괴되지 않은 것인가? 혹은 그저 사회가 분화되지 않은 것인가? 혹은 저변에 숨어 있는 것일 뿐인가?

베트남 영화 디자이너

글쓴이 이가
서사 의존적인 인간의 삶과 사회,
그리고 아름다움에 관심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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