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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 양조위를 볼 수 있는 베트남 영화, ‘씨클로(Cyclo)’

icon view5393 2022-05-19

※ 해당 기사에는 씨클로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씨클로(Cyclo)

– 개봉: 1996.04.20
– 장르: 범죄, 드라마
– 국가: 베트남, 프랑스
– 등급: 청소년관람불가
– 러닝타임: 120분

영화 ‘씨클로’ 포스터(출처: 네이버 영화)

트란 안 홍 감독의 ‘씨클로’는 1995년 당시 베니스 국제 영화제에서 최고상인 황금사자상을 받은 작품이다. 베트남 개혁 개방 이후 사회에 대한 부정적 표현으로 베트남 당국으로부터 상영금지처분을 받은 문제작이기도 하다. 또한 이 영화는 감독의 데뷔작 ‘그린 파파야 향기’의 비평적 성공 이후 홍콩자본으로부터 투자를 받아 만들어진 국제적인 프로젝트이며, 홍콩 배우 양조위가 주요인물로 등장한다.

90년대 개혁 개방 이후의 호치민을 배경으로 하는 이 영화는 자전거 택시인 씨클로를 몰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일을 이어받은 한 소년의 이야기다. 소년의 가족은 가난해서 어린 동생은 구두를 닦고, 누이는 낮에 학교에서 공부하고 저녁에는 식당에서 일을 하며 생계를 꾸린다. 가난하지만 평화로운 생활을 하던 어느 날 갱단이 소년이 몰던 씨클로를 훔쳐가게 되고 생계를 위해 소년은 다른 갱단에 들어가게 된다.

죽은 아버지를 대신해 씨클로를 모는 소년(출처: 네이버 영화)

영화 ‘씨클로’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네오리얼리즘 영화에서 갱스터 장르 영화로 전환되는 속도다. 이 영화의 설정을 읽은 관객들이라면 네오리얼리즘의 우리나라 대표작 중 하나인 ‘자전거 도둑’을 떠올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탈리아 파시즘의 선전영화에 대항하기 위해 탄생한 네오리얼리즘 영화는 ‘배우 없이, 스타 없이, 오직 실제의 삶만’이라는 가치 아래, 주로 자연광을 사용하고 특수효과를 배제하며 극적 감흥보다는 실제의 삶을 드러내기 위해 느슨한 서사구조를 가진다.

이 영화의 눈부신 첫 장면은 그와 비슷한 기법으로 씨클로를 몰고 가는 소년을 비추며, 가난하고 혼잡한 개방 이후의 호치민 거리를 그려낸다. 이어진 두 번째 신에서는 곧바로 가난한 자들의 대출을 위한 면접 과정을 보여준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직업과 사인, 집안 사정, 씨클로 제품 회사에 대해 물어보는 공무원과의 무미건조한 대화가 오간다. 이어 소년이 씨클로로 물건을 배달하는 장면에서는 물건 주인이 구매자에게 지불한 돈의 일부가 소년의 손으로, 그리고 소년이 받은 돈 일부가 다시 씨클로 회사 사장의 손으로 들어간다.

짧은 시간 안에 감독은 관료에 의해 주도되는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에서의 돈의 흐름과, 그 속에서의 소년의 처지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첫 시퀀스에서 펼쳐지는 베트남 거리와 사회의 풍경은 이 영화를 네오리얼리즘적인 영화로 보이게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무난한 편집을 선호하는 네오리얼리즘에 비해 이 영화의 초반부는 매우 조직적이고 압축적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압축적인 구성에는 이유가 있는 듯하다. 트란 안 홍 감독은 가난하지만 순수한 세계에서 시장 자본주의로의 이전이 어떤 의미였는지를 보여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영화는 소년의 씨클로를 갱단이 훔쳐간 이후 급격히 장르 영화처럼 변화한다. 사실 그 갱단 역시 씨클로 회사 주인에 의해 움직이는 조직이었고 소년은 이후 시인(양조위 분)이 이끄는 다른 갱단에 들어가게 된다.

영화의 초·중반부는 마치 갱스터 무비처럼 조직에 입문하고 성공한 후 파멸에 이르게 되는 과정을 그리려고 하는 것처럼 보인다. 소년은 어색하게 범죄를 저지르고 타인을 도와주려다 조직원으로부터 휴머니스트냐고 조롱을 받기도 하지만 곧 아무렇지 않게 다른 조직의 창고에 불을 지르고 큰 돈을 벌게 된다. 그 사이 관객은 베트남의 두 세계를 아주 빠르고 충격적으로 경험한다. 아마, 전쟁으로 다리를 잃어 음식점 손님들 사이에서 연주를 하는 음악가들의 음악 사이로 비치는 구두닦이와 식당에서 일하는 누이의 모습과 대비되며, 명멸하는 화려한 조명과 굉음같은 음악 속에서 춤을 추는 나이트 클럽 장면이 바로 그것이다.

감독이 힘주어 그려낸 영화의 초반부는 사실상 이 충격적인 전환으로 수렴된다. 이는 베트남의 네오리얼리즘이 품을 수 있는 세계가 아주 빠르게 붕괴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게 소년이 갱스터 조직에 발을 들이는 동안 누이는 시인이 관리하는 매춘조직에 들어오게 된다. 그녀의 고객들은 주로 페티시적인 인물들인데, 에비앙 물을 먹이고 소변을 보게 하거나 검은 스타킹에 성욕을 느끼는 식이다.

사실 갱스터 무비 장르는 자본주의가 폭력적이고 약탈적이라는 상징 하에서 성립된다. 이 영화도 소년이 발을 들인 갱스터 조직에서는 폭력과 약탈을, 누이를 둘러싼 페티시즘의 세계를 통해서는 검은 스타킹을 갈구하듯 돈을 숭배하는 물신주의적 자본주의 사상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갱스터 무비의 해체

그런데 이 영화는 갱스터 영화처럼 조직 간의 대결 혹은 주인공의 성공과 파멸로 이어지지 않고 후반부 갑자기 방향을 비튼다. 순수성을 잃어버린 이들의 ‘내면의 파괴’라는 테마는 이미 ‘시인’이라는 인물에서 예견된다. 시인은 말이 없고 성격도 매우 모호하게 그려진다. 또 씨클로 회사 사장인 여주인과는 어딘가 이상한 관계를 맺는 듯하고, 다른 매춘을 하는 인물들과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서로 사랑하고 있는 듯 보이지만 폭력적이고 부도덕한 행위를 멈출 생각이 없다. 그를 어떤 인물이라 규정하기는 어렵지만 명확한 것은 냉소적이고 고독하다는 것이다.

이는 명확히 양조위가 출연했던 왕가위 감독의 영화 속 인물의 공허와 겹쳐 있다. 이 영화의 저변에 녹아있는 초록색 계통의 색감이나 감각적이고 탐미적인 표현 역시 왕가위 영화의 태도와 매우 닮아 있다. 당시 ‘중경삼림’과 같은 왕가위 영화는 세기말 물질적 풍요 속에서 삶의 방향을 잃어버린 도시인들의 공허를 감각적이고 탐미적인 화면에 그려냄으로써 국제적인 공감대를 얻어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의 공허는 자신이 발을 담근 세계의 룰, 자본주의적 질서 자체의 폭력성을 향해 효과적으로 변환되어 있다. 시인이 냉소적인 것은 몸 담고 있는 세계에 도덕적으로 동의할 수 없지만 이탈할 수도 없기 때문일 것이다.

약에 취해 파란 페인트를 뒤집어 쓴 소년은 총으로 자살을 시도하지만 이내 실패한다. 장애가 있는 아들을 교통사고로 잃은 씨클로 회사 주인은 소년을 끌어안고 아들에게 벌이진 일인 것처럼 슬퍼한다. (출처: 네이버 영화)

영화의 후반부는 시인이 사랑했던 누이가 강제로 순결을 잃어버리는 사건으로부터 갑자기 모든 파괴가 시작된다. 시인은 순결을 뺏은 그 고객을 죽이고 스스로 집에 불을 질러 자살한다. 그리고 씨클로 회사 주인의 장애가 있는 아들은 갑작스럽게 차에 부딪혀 죽어버린다. 소년 역시 약물에 취해 정신적으로 완전히 붕괴되어 버린다. 이 영화가 갱스터 무비와 결을 달리하는 것은 주인공의 몰락이 외부적인 것에 의해서라기보다는 바로 내부로부터 온다는 것이다. 이 영화의 후반부는 순수성을 잃어버린 개인들의 한 편의 심리극처럼 흘러가며, 일종의 왕가위 장르의 영화가 되어 버린다. 감독은 그 파멸에 대한 이미지를 영화 속에 등장하는 불꽃처럼 격렬하고 탐미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자신의 집에 불을 지르고 자살하는 시인(양조위 분)(출처: 네이버 영화)

이 영화는 표현적인 완성도가 높을 뿐 아니라 장르 자체에서 사회적 상황을 적절히 내포하고 있다. 아마 외국 평단의 긍정적인 반응에는 이런 요소들이 작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본다면 이 내면의 붕괴가 과연 베트남에 국한되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 이 영화가 비판하고 있는 ‘개인의 내면을 파괴하는 자본주의’라는 테마는 사실 어떤 사회를 겹쳐놓더라도 비슷한 이야기로 도출된다.

물론 베트남의 개혁 개방이 다소 템포가 빨랐고 그래서 더욱 충격적일 수밖에 없는데, 그 부분에서 이 영화의 빠른 전개 속도는 상당한 설득력을 얻는다. 하지만 감독의 첫 번째 작품 ‘그린 파파야 향기’처럼 이 영화 역시, 베트남을 이방인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을 지우기 힘들다. 자본에는 국적이 없기에 세계 자본주의 체제에 편입된 베트남의 영화가 왕가위의 홍콩 영화처럼 변화하는 것에는 설득력이 있지만, 거리의 풍경과 전쟁의 흔적을 보여주는 무기들이 등장하는 일부 장면 외에는 홍콩의 이야기와 다른 점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은 어딘가 석연치 않다.

사실 한 사회의 내부로부터 멀어질수록 영화는 사회적 상황을 보다 상징화, 미학화 시키는 경향이 있다. 봉준호 감독의 초기작에서 그려졌던 후줄근한 풍경 속에 저며있는 한국 사회의 공기와, 최근작인 기생충의 말끔한 구도와 상징들을 비교해 보라. 그것은 봉준호 감독이 이미 가난한 청년세대로부터 멀어져 버렸기 때문에 미학화된 것이다.

도대체 트란 안 홍 감독이 말하는 순수했던 시절은 언제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공산 혁명과 반식민지 전쟁을 수행했던 그 시절인가, 아니면 개방 이후 가난했던 시절인가. 결국 도덕적이었던 소년의 아버지로부터 시작되는 순수에 대한 열망은 그 무엇도 아닌 자신의 어린 시절로 귀결된다. 씨클로 회사 주인의 장애인 아들과 약에 취한 소년의 퇴행적 행동이 도드라지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영화에서는 드물게 라디오헤드의 Creep 한 곡이 풀로 삽입됐다. 눈에 띄는 젊은 양조위의 모습. (출처: 네이버 영화)

하지만 그럼에도 이 영화가 진실되게 느껴지는 것은 바로 시와 음악 때문이다. 영화보다 유명한 삽입곡 ‘라디오헤드의 creep’과, 고통의 순간마다 등장하는 다양한 장르의 음악은 종잡을 수 없는 감독과 인물의 고통을 함께한다. 왕가위 영화가 그리는 고독 저변에 수년 후 중국에 흡수되어 사라질 홍콩의 운명이 숨어 있었듯, 이 작품의 고통 역시 개인으로서 어찌할 수 없는 격동의 베트남 역사가 숨어 있는 것이다. 감독이 그 역사 속에서 베트남 바깥으로 이탈했다 하더라도(트란 안 홍은 어린 시절 베트남을 떠나 식민 모국인 프랑스로 이주했다.) 그 고통을 함께하는 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어떤 방식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이 혼란스러운 영화에서 느껴지는 이상한 진심은 감독 스스로도 알 수 없는 어떤 고통을, 음악과 시 그리고 자신의 영화로 끌어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글쓴이 이가
서사 의존적인 인간의 삶과 사회,
그리고 아름다움에 관심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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